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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창고/영화 이야기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by 서울나기 2019. 10. 11.
가진 것 하나 없는 포크송 가수. 르윈 데이비스의 일주일간 여정을 담은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리뷰는 영화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전제로 쓰였습니다.

시놉시스

뉴욕의 시린 겨울에 코트도 없이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매일 밤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는 무일푼 뮤지션 르윈. 듀엣으로 노래하던 파트너는 자살을 하고, 솔로 앨범은 팔리지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간다. 우연히 떠맡게 된 고양이 한 마리처럼 계속 간직하기에는 점점 버거워지는 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유명 음악 프로듀서인 버드 그로스맨이 주최하는 오디션에 참여하기 위해 시카고를 향한 여정에 오르게 되는데...

 

예술가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H. Maslow)는 ‘인간의 동기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 1943)’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욕구 계층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욕구가 충적되면 다음 단계에 있는 욕구가 생겨난 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행동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족된 욕구는 더 이상 동기부여 요인이 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존재의 욕구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을 날까지 이어지는 '삶'이라는 거대한 물음표를 외면한 체 오랜 시간 '먹고사는 문제'에 더욱 집중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이들은 '먹고사는' 문제보다 존재의 욕구를 먼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여정에 올라서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질이나 재능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거기에 포위되고야 마는 것이죠. 우리들은 그런 사람을 '예술가'라고 부릅니다. 예술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인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그의 책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예술가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글쓰기는 작가의 삶을 파먹고 삽니다. 우리 몸을 갉아먹는 촌충과 다를 게 하나 없단 말이지요. 작가라는 우아하지만 진절 머리 나는 직업을 자신의 본업으로 택한 사람은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바꿔 말하면 르윈 데이비스는 살기 위해 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기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기본적인 욕구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좌절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지 않아서가 아닌 자신은 재능이 없다는 좌절감 때문입니다. 르윈은 돈을 버는 일에 대해서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상업적인 음악을 하는 이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부조리함도 보여줍니다. 그 스스로 저주하면서도 타협해야 하는 현실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죠.

 

레퀴엠

레퀴엠 ([라틴어] requiem) [명사] 죽은 자의 평안을 기리는 노래

영화가 시작하면 그는 한 사형수가 지난 삶을 돌아보는 장송곡을 부릅니다. 이어 골페인 교수 집에서 깨어났을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흘러나옵니다. 그가 자살한 자신의 파트너를 그리워하며 자신 또한 생을 끝내려고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죽은 그의 동료는 순수한 예술적 성취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반에 골페인 부인이 르윈의 파트너 부분에 재미로 화음을 넣었을 때 화를 낸 것이죠.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뒷골목에서 얻어맞는 장면부터 영화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유명한 예술가의 성공 이야기가 아닌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 데는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 있지만 진짜 비극은 죽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가 도망치면 칠수록 그가 외면하고자 했던 것들과 언젠가는 마주해야 합니다. 존재의 욕구가 아닌 바로 결핍의 욕구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골페인 교수의 고양이를 떠 맞고,레이블 사무실은 저작권료를 주지 않고, 친구의 아내이자 자신의 옛 여자 친구였던 진은 임신했다고 쪽지로 줍니다. 또 죽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아이는 옛 여자 친구와 함께 애크론 어디엔가 살고 있습니다. 돌봐야 할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 있고, 잃어버린 고양이도 찾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 점점 늘어갑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책임 질 수도 없고, 책임지지 않을 수도 없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 되죠.

 

오디세이아

재대를 앞둔 군인은 거물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먼(밥 딜런의 매니저를 했던알버트 그로스먼을 염두하고 만든 가상인물)이 시카고에 있는 '뿔의 문'에서 공연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그에게 대답했다.
“나그네여! 꿈이란 다루기 어렵고 해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들에게 모두 그대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라오.
그림자 같은 꿈의 문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뿔로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상아로 만들어졌답니다.
베어낸 상아의 문으로 나오는 꿈들은
이루어지지도 않을 소식을 전해주며 속이지요.
그러나 반들반들 닦은 뿔의 문으로 나오는 꿈들은
누가 그것들을 보든 꼭 실현되지요."
-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상아의 문과 뿔의 문이라고 하는 두 가지 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아의 문으로 나오는 꿈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들을 전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지만 뿔의 문으로 나오는 꿈들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신화 속의 문입니다.

 

시카고 - 애크론 - 뉴욕

상아의 문에서 나오는 꿈을 꾸던 르윈은 결국 뿔의 문을 찾아 뉴욕에서 시카고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가까스로 도착한 '뿔의 문' 사장은 르윈에게 내면의 소리를 들려달라고 합니다. 르윈은 열정을 다해 노래를 하지만 돈은 안된다는 속물적인 이야기만 듣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체 선원이 되고자 하지만 그것 조차 되지 않습니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뜻은 '증오를 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내내 르윈은 다른 사람들의 증오를 받습니다. 그가 바로 오디세우스 인 것이죠.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발음이 바로 율리시즈입니다. 그것은 영화 후반에 밝혀지는 르윈이 잃어버리거나, 착각하거나, 버리거나, 상처 주었던 고양이(자신의 내면)의 이름이죠.

 

고양이 율리시즈는 르윈의 자아를 상징합니다.

시지프 신화

오디세우스 아버지는 시지프스입니다. 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죄로 영원히 두근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려놓는 형벌을 받게 되는 사람이죠. '시지프스 신화'를 쓴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 앞에 선 인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살과 희망, 그리고 반항입니다. 르윈의 파트너 마이크는 자살이라는 첫 번째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해답이 아닙니다. 자살은 삶을 직시하는 명철한 의식에서 빛의 세계 밖으로의 도피하는 이 치명적 유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카뮈가 말하는 제2의 방안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희망 역시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카뮈는 '자살' '희망'은 삶을 직시하지 않고 망각과 무()로 도피하는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캐릭터는 시카고에 함께 갔던 마약을 하는 뮤지션과 이상한 시를 읊는 과묵한 시인입니다. 그들은 과도한 관념과, 희망(마약)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에서 타락한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이 세계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것은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라고 말합니다.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죠. 영원히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기는 시지프스와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내려는 반항적 의지와 저주를 한 몸에 받아 들어 감수하면서도 미소를 띨 수 있는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야 말로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고 말합니다.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식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골페인 교수의 집에서 깨어난 르윈. 음악의 '도돌이표'처럼 영화 또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역시 처음과 같이 Hang Me, Oh Hang Me를 부르지만 이번에는 이어서 듀엣이었던 마이크와 함께 불렀던 Fare Thee Well을 부릅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죽음의 순환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든 자살한 파트너 마이크는 그에게 순수한 예술적 성취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른다는 건 다시 이상을 꿈꾸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u revoir! ”또 봅시다.”

자신의 면상을 가격한 노신사에게 르윈은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우리는 르윈이 계속 살아갈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말이죠.

 


 

언젠가 시간을 기록하는 레코드판을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테이블 위에 우리의 인생에 대한 레코드판을 올려놓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레코드판에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입니다. 언젠가 마지막 연주가 끝나고 나서 신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녹음한 시간 위에 녹음한 레코드판을 선물 받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무한의 시간 위에 앉아 우리의 '운명 교향곡'을 감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 연주 솜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죠. 무한의 시간 위에서 끔찍한 연주를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지금까지는 그래 왔지만 다음 트랙에서는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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