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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창고/영화 이야기 최근 넷플릭스에서 본 일본 애니메이션

by 서울나기 2020. 6. 20.

애니과를 나왔지만 미국 애니는 디즈니, 일본 애니는 지브리 딱 그 정도 범위만 애니를 봐왔다. 사실 애니보다는 영화를 더 좋아해서..

최근에 넷플릭스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이 올라왔길래 요즘 일본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짜나 궁금해서 그냥 걸리는 대로 봤다.

1. 장난을 잘치는 타카기 양

아직 이성에 대해 눈을 뜨지 않은 소년의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어긋나게 만드는 로맨스 코미디 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2기가 만들어진 것 같은데 확실히 1기보다는 연출이나 내용이 좋아진 것 같다. 매화 감정을 조금씩 잘 쌓아서 시즌 마지막에 터트린 엔딩이 무척 좋았다. 의외로 원작 팬이 많은 듯하다. 다만 매번 약점을 잡아 상대를 공격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일본스럽다고 할까. 내 모든 걸 이해해주는 엄마 + 나만을 좋아하는 착한 애인이라는 전형적인 히로인 상은 아직도 변하질 않는구나.

2. 목소리의 형태

이 스튜디오 작품은 처음 봤다. 그림이 굉장히 유려하다. 줄거리는 왕따 가해자가 커서 자기가 괴롭혔던 소녀를 찾아가 용서를 빈다는 이야기이다. 그 소녀는 주인공의 죄를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서로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이거야 말로 진정한 가해자의 판타지 아닌가? 내가 죄를 빌면 상대도 나를 용서하고 좋아해 줄 거라는 건 가해자 입장의 편한 상상이다. 연출에 있어서 점프컷이 너무 많이 나와 원작을 안 본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엔 스토리에 구멍이 많아 보였다. 왜 인기가 많은 건지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3. 심심한 칠드런

로맨스 코미디 장르로 여러 커플이 등장해 엇갈리는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일단 성우들이 미친것 같다. 그동안 성우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안 썼는데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대정신에 다소 어긋나는 커플도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귀여운 커플들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짜는 작가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평범했던 학창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로서 이야기를 짰다고 한다. 애니는 1기만 나온 것 같아 만화책으로 엔딩까지 읽어봤는데 꽤 괜찮은 마무리를 보여준다. 이 작가의 특이한 점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참 독특하게 표현한다. 또 캐릭터가 비슷비슷해서 머리 색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게...

4.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이 자신의 초능력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는 게 주된 내용의 학원물이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뜻밖에 터지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 친구가 일 끝나고 집에 오면 자기 전까지 이런 종류의 애니만 틀어놓았는데 왜 그랬는지 왠지 알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웃기만 하는 작품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5.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에서 아직까지 안 본 작품 중 하나였는데 (다른 하나는 마녀 배달부 키키) 결국 이걸 이번에 봤다. 멋진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순수한 주인공이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불우한 시대를 만났을 뿐이라는 내용의 애니였다. 누구든 자신이 발 붙이고 살아가는 사회의 기본 베이스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법이다. 하야오 또한 그러한 부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가해자 일본이라는 레이어는 전부 걷어내고, 피해자 일본이라는 레이어를 풍경 위에 얹어 놓는다. 예전부터 이런저런 글을 읽어서 하야오가 무척이나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노골적이라 놀랐다. 그는 전쟁으로 성장한 군수 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즐겨 그리는 건 무기와 전투기다. 그에게 있어 전쟁 혐오는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의식적으론 평화를 외치지만, 내면에서는 전쟁의 풍경에 매력을 느끼는 자신의 모순을 이 작품을 제작하며 스스로 인정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그것에 경멸을 보낸다. 누구든 자기 깊은 곳에 감춰진 욕망을 남에게 이야기하면 욕먹는 법이다.

총평

이 작품들은 무척 달콤하다. 사랑스럽다. 재미있다. 마치 설탕을 잔뜩 뿌린 케이크 같다. 일본의 애니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판타지 같다. 연애 판타지, 일상 판타지, 학원 판타지, 전쟁 판타지 그것도 아니라면 가해자 판타지까지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판타지는 무조건 나쁜 것이고, 오직 다큐멘터리 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은 언제나 현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고지식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현실이라는 오리지널이 비록 고단할 지라도 그것을 어떻게든 고치고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불만족스러워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숨어버리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 이어서도 안된다.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은 평생 그 시절을 떠올리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일본은 여전히 버블 버블 하던 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들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병이다. 모두가 예쁘고, 멋지고, 잘 살던 그 세계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이제 없다.

어떤 작품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좋다, 나쁘다 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는 작품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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